‘워싱턴’에서 ‘오바마’까지.(13)-13대 대통령 ‘밀라드 필모어’(1800~1874)

김유진 / / 기사승인 : 2010-02-16 15: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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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신보영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연구원)

재임기간: 1850-1853/ 단임 / 휘그당.

‘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부통령이었던 ‘밀라드 필모어’는 관례에 따라 권력을 승계한다.

그리고 당시 워싱턴 정가를 뒤흔들고 있던 노예제에 관한 논쟁 역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는데 끊임없이 이어지던 법안 ‘1850년 합의안’(Compromise of 1850)에 대한 공방이 끝을 보고 의회를 통과해 대통령의 책상에서 필모어의 서명을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 법안은 새로운 주 캘리포니아를 노예 주로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금지 주로서 인정 할 것이냐에 대한 내용으로 이 법안의 결정사항에 따라 그동안 동수이던 노예 인정 주와 금지 주의 균형이 무너지게 돼 있었다.

이는 정치판의 대규모 지각변동으로 이어지는 아주 민감한 사안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서로간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고 연방의 해체론까지 거론되면서 끝없는 소용돌이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바로 법안의 논쟁 중심에 테일러가 있었다.

그의 강력한 반대가 걸림돌로 작용하며 의회는 욕설과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심지어 의원들끼리 총까지 겨눠대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와중에 일어난 테일러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막다른 길목에서 찾은 한줄기의 실마리가 돼 주었고 법안은 의회를 통과하게 된다.

마치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말이다.

‘밀라드 필모어’, 그는 1800년 1월 뉴욕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리 풍족한 형편이 아니었기에 그의 부모는 그가 장사꾼이 되기를 바랐다고 하는데 공부를 좋아한 그였기에 독학으로 변호사의 길을 간다.

정치에 처음 발을 들여 놓게 된 것은 그가 28살이 되던 해였다.

뉴욕 주에서 주 의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연방하원에도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임기 중에는 의장의 자리에 도전하기도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2위 자리에 머물고 만다.

또 다시 뉴욕 주지사에도 도전하지만 역시 실패하고 대신 감사관의 자리에 선출되는데, 뉴욕 역사상의 첫 번째 감사관으로서 그는 금융시스템을 대폭 개선하게 된다.

오늘날의 미국 은행제도 기틀은 바로 이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뒤 남부출신의 ‘재커리 테일러’가 휘그당의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게 되자 북부 세력들은 균형유지를 위해 노예 금지지역 출신의 필모어를 부통령 후보로 선택 하게 되었는데 이는 필모어가 노예정책에 대해 뚜렷한 성향을 보여서가 아니라 당시 인구가 많았던 뉴욕의 표심을 고려해서 결정한 다소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이렇게 부통령에 당선된 필모어는 테일러의 사망 뒤 그동안 경직되었던 정국을 풀어나가는 의외의 역할을 하게 된다.

바로 ‘1850년 합의안’의 의회통과를 두고 하는 말로서 대통령 취임 후 그의 첫 번째 임무이기도 했다.

법안의 찬성자들로만 이루어진 새로운 내각의 전격적인 구성과 함께 법안 통과에 전력을 다한 그의 모습을 두고 판단할 때 그는 전임 대통령 테일러가 생존해 있을 때도 완전히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정치권을 떠들썩하게 했던, 아니 미국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 되었던 이 법안의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모두 5개의 주요 항목으로 구성된 이 법안은 당초 하나로 묶여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모어의 요청으로 보다 빠르고 효과적인 일정관리를 위해 다섯 조항으로 나뉘게 되는데, 첫째, ‘캘리포니아를 자유 주(주 스스로 노예인정 여부를 결정짓게 한다는 내용으로 노예폐지론자들의 극렬한 불만으로 이어진다)로 받아 들인다’, 둘째, ‘텍사스의 경계를 정부안대로 확정하고 피해를 보상한다’, 셋째, ‘뉴멕시코에 미국 영토 지위를 부여한다’, 넷째, ‘도망노예 처리를 위해 연방관리를 배치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워싱턴 DC(District of Columbia)에서 노예 거래를 금지한다’로 구성돼 있다.

법안은 통과가 되었지만 갈등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갈등은 당의 분열과 쇠락으로 이어지면서 당의 종말을 예고하게 되었고 필모어는 다음 대선에서 후보지명을 받는데 실패한다.

휘그당의 마지막 대통령후보였던 ‘윈필드 스콧’ 또한 집권에 실패해 당은 간판을 내리고 모두 흩어진다.

그 중 대다수가 지금의 공화당인 ‘Republican Party’로 자리를 옮겨 보수 세력의 맥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때 휘그당에서 공화당으로 이동한 인물 중에 너무도 유명한 ‘아브라함 링컨’이 포함돼 있다.

필모어는 공화당의 입당 권유를 거절한다.

대신, ‘반 이민주의’, ‘반 카톨릭’, 일명 ‘알지마 당’(know-nothing party)으로 불리던 아메리카당에 입당해 ‘앤드류 잭슨’의 조카인 ‘앤드류 잭슨 도넬슨’과 러닝메이트를 이루며 1856년 대권에 다시 한 번 도전을 하게 되는데 결과는 참패였다.

하지만 21.6%라는 국민투표 득표율은 미국 역사상 3당으로서 기록한 최고의 득표율로 남게 된다.

이는 아마도 시끄러운 정치 싸움에 넌더리를 낸 국민들이 알지마당의 창당 취지를 상당부분 공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1850년대 초반은 그야말로 혼돈의 시기였다.

세상이 온통 노예제와 분리론으로 시끄러웠고 이 때문에 그에게서 별다른 공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굳이 꼽자면 ‘유타 준주의 인정’ 또는 ‘일본에 대한 개방 요청’ 정도가 될 것이다.

그는 또 한편 지독한 독서광으로서 백악관 최초의 도서관을 설치한 대통령이란 기록도 남아있다.

어려운 시기에 대통령직을 맡아 힘든 시간을 보낸 그였지만 자리에 걸맞는 인격과 품위를 갖춘 인물로 전해진다.

이런 사실은 그의 일화를 통해서 알게 되는데, 한번은 유럽여행 중 옥스퍼드 대학으로부터 명예 법학 박사학위의 제안을 받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거절의 이유로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열악했던 교육환경을 아쉬워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그는 누구도 자기가 읽지도 못하는 학위를 수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이 역시도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받지 못해 라틴어를 배우지 못했음을 두고 한 말이라 보여진다.

어린 시절 전통적인 교육을 경험하지 못했던 그인지라 더더욱 후학 양성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자신의 고향근처인 버팔로에 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으로 학교 일을 돌보았으며 부통령과 대통령의 재임 기간에도 학장직을 겸했다고 한다.

그의 학교 사랑은 그가 심장쇼크 후유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가 세운 학교 버팔로 대학(University of Buffalo)은 지금도 그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명문대학으로 남아 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큰 빛을 보지 못했던 대통령 ‘밀라드 필모어’, 그는 미국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분열된 국론을 수습하고자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다가오는 전쟁은 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는 화합과 절충을 통해 전쟁을 피하고자 했지만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 후 미국은 더욱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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