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졸업시즌이다.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 졸업식장에서 축사를 해야 하는 내 일과도 덩달아 바빠진 요즘이다.
특히 중 고등학교 졸업식 축사를 통해 해마다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졸업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졸업이 인생의 완성을 위해 또 다른 목적지를 설정하고 길 떠날 채비를 시작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해마다 빠지지 않고 당부하는 말이다.
졸업은 인생을 결정짓는 분기점이 아니다.
단지 자신의 인생을 운영하는 과정에 있어 그 준비상황을 점검해 보는 기능 정도에 불과하다.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는 10대인만큼 졸업에 대한 과도한 확대 해석(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혹여 원하는 상급 학교 진학이 좌절되거나 졸업 이후의 현실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해도 기죽을 필요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최선을 다해 차분하게 인생을 준비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도 좋다.
언제든 새롭게 시작한다 해도 결코 늦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이다.
늦었다고 깨달은 시점이 가장 빠른 전진의 시기라는 선대의 조언을 기억하라.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이다.
이후 펼쳐질 경쟁국면을 염두에 두고 세계 속의 내가 갖추어야 할 경쟁력 구축에 집중해야 하는 다음 과제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남녀 학생 수십명이 옷을 벗고 인간 피라미드를 쌓거나, 선배들이 졸업한 여자 후배 옷을 벗기고 케첩을 머리에 뿌리거나,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옷을 찢고 바다에 빠뜨리거나, 알몸으로 도심을 질주하는 등 도를 넘는 ‘졸업식 뒤풀이’가 세간의 우려를 낳고 있다.
그야말로 난동의 현장이 따로없다.
삭막한 청소년들의 강팍한 정서를 대변하는 것 같아 심란하다. 더구나 이들의 뒤풀이 장면을 찍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고 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알몸 뒤풀이가)선배들의 강요로 이뤄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고스란히 반영한 사건이다.
자신들의 설자리조차 마련하지 못한 기존 질서와 기성세대의 무능에 대한 나름의 항거일 것이다.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는 것만이 능사라고 가르친 우리의 교육현실 역시 ‘졸업식 난동’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리고 걱정이다.
청소년들의 불만이 일탈로 이어진 표출 정도로 결코 가볍게 치부할 수 없는 이 사건 앞에서 입을 열어 달리할 말이 없다.
책임을 통감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지켜보며 한없는 우울함에 빠져들게 되는 이유일 수도 있다.
뒤풀이 동영상은 입시위주의 기형적인 교육체계가 학교 현장을 괴물로 만든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청소년들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그저 기계적으로 모든 교육 일정을 입시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학생도 학교도 교사도 설자리가 막혀 있는 형국이다.
생각하면 가슴이 터질 듯 답답하다.
젊은 세대만 나무랄 순 없다. 그러기에는 석연치 않은 기성세대의 패착이 너무도 많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그 원인부터 따져 볼 일이다.
점수 밖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학교에서 아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반성해야 한다.
항상 귀가 따갑도록 반복하는 말이지만 인성 교육부재가 화근이다. 요즘의 학교교육에 점수 외적인 과제가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가.
점수 외에는 아무런 교육적 도구가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 사제지간마저 ‘거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며 졸업식장에서 눈물짓던 사제지간의 정리는 사라진 지 실로 오래다. 우리의 어리석음이 꽃처럼 피어나야 할 청소년기의 감수성을 짓밟은 셈이다.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인생의 ‘수많은 보석’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요즘의 청소년들은 참으로 불행한 세대다.
무한한 가능성과 담백하고 솔직한 마음자세, 그리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백전 불굴의 의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대신에 패스트푸드에 찌들어 자기 인생에 대한 희망이나 비전조차 가물가물해진 나약한 청춘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걱정하면서도 텔레비전이나 자동차처럼 그때그때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교육 현안에 대한 처리가 자꾸 미뤄지게 되는 것 또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식으로든 문제해결에 더 큰 관심과 적극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청소년 당사자 처벌에만 비중을 둔 해결책은 뇌관을 그대로 둔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는다. 일시적인 해결책보다는 교육의 질적 개선 등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
이대로 간다면 피비린내 나는 치열한 경쟁만 존재하는, 인간성 상실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결국은 스스로에 의해 멸망되고 말 미래사회가 너무도 뻔히 내다보인다.
희망도 없고 비전도 없는 죽음의 도시에서 서로 뒤엉켜 싸워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설사 희망과 비전이 있다한들 지금처럼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목표치라면 소용이 없다.
상대방을 누르고 승리를 쟁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유하는 비전과 희망을 통해 더불어 함께 이기는 성숙한 미래사회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동의 선이다.
미국의 미셸 리 교육감이, 점수 따는 데만 몰입시키는 인간의 다양한 욕구 발전을 저해하는 현상을 초래한다며 우리의 교육방식을 걱정했다는 외신을 접했다.
그녀의 지적이 아프지만 백 번 맞는 얘기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4대강도 세종시도 이 문제보다 시급하지 않다.
백년지계의 안목으로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할 대상은 오로지 교육문제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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