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더구나 여배우를 보러 가는 길은 신나는 길이다.
양평! 두물머리,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무대 위에 있었다. 연극 "태동"이라는 작품의 실연 무대에 선 그녀를 지켜봤다.
" 박리디아 " 는 배우다.
무대에서 내려와 관객들과 사진을 찍는 그녀를 지켜보다가 말했다.
" 에이, 땀이나 좀 닦고 ᆢ"
박 리디아는 열정을 뿜어내는 배우다. 이마에서부터 뽀얀 볼을 타고 목까지 흐르는 땀이 카메라에 잡힐 정도여서 그냥 나온 말이다.
돌아보며 아이처럼 웃는다.
20년쯤 전, “여자는 한 달에 한 번씩 마술에 걸린다.”라는 카피로 유명한 브랜드 광고의 주인공으로 대한항공, 삼성, 쾌남, 등 당시 최고 브랜드 모델로 90년대 광고 여왕이라 불리던 그녀의 그 시절 웃음이 느껴지면서 " 한번 딴따라는 영원한 딴따라 ! " 라는 말이 떠올랐다.
"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을 가훈보다 중하게 여기는 해병대 출신들이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해병대보다 씩씩한 여자다. 배우 박리디아는, 극단 ' 뿌리'에 입단한 사건? 때문에 아파트 베란다에 갇혀서 야구 배트로 맞으며 견딘 적도 있고, 일년내내 연극을 하며 침투 작전하듯 대리운전을 감행했던 용기가 있는 딴따라다.
돈 벌어서 연극하고 싶어서 모델을 지원해서 의문의 대박이 났던 그 시절, 당시 모델라인 이재연 대표의 말 한마디 " 모델을 하면 돈 벌 수 있어!" 이 말 때문이었다.
어쨌든,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연극을 계속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할 거니까 준비가 필요했지요. 유학을 떠났어요. 러시아 국립예술원 '기티스'에서 연출 공부했고 뉴욕에서 연기 공부했지요. 뉴욕에서 '우타하겐'을 만난 건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었어요. 내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었으니까요."
2003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교직자이신 부모들의 소원인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중앙대에서 석사, 박사과정, 세종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로드랜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아나바다 운동' 의 창시자인 엄마가 제일 좋아하셨지요. 자신이 소원했던 대학교수가 됐으니까요."
그녀는 대학교수가 되어서도 2003년을 잊지 않는다.
"한해 동안 전쟁하듯 연극판을 돌았거든요. 14편의 연극을 끝냈을 때, 내 마이너스 통장엔 고스란히 1,000만 원짜리 빚만 찍혔어요. 그리고 대리운전을 시작했지요. 잠깐씩 대리인 생을 사는 배우인 생과 대리운전은 전혀 다른 참혹함을 경험케 했어요."
아침엔 대학 강의, 낮엔 연극, 저녁엔 대리운전으로 팽이처럼 돌아가던 그녀에게 전해진 남자 선배의 부드러운 한마디 " 여배우가 심야에 대리운전을 하는 건 너무 위험해! "는 비수처럼 날카롭게 가슴을 찔러왔다.
그렇게 배우의 삶이 천형 같은 무게로 그녀를 짓누르고 있을 때 따뜻한 나라에서 메시지가 왔다.
2016년 영어로 체계화된 연기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 열정과 근면성과 군인 같은 전투력을 가진 사람, 마치 그녀를 알고 청하는 자리 같았다.
체계 있는 기초연기를 영어로 가르칠 수 있고 정규교육만 여덟 시간, 그 이상을 특수훈련하듯 수업할 수 있는 사람, 민간인 중에는 그녀를 대리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곳, 베트남의 딴따라들은 아직도 전투하듯 딴따라질을 하고자 하는데 그들을 지휘할 캡틴이 없었던 거다.
두말없이 '캡틴 리디아'가 떴다.
스텔스기처럼 무음으로 착륙한 캡틴 박리디아는 박항서처럼 달렸다.
그녀의 일상은 그곳에서 매일 기적이 됐다.
"목 말라하는 그 아이들의 백지 같은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아이들 가슴속에 잠겨진 판도라의 상자들을 발견했어요. 그 상자를 하나씩 여는 일을 했을 뿐 입니다. 물론, 러시아 국립예술원 '기티스'에서 연기 훈련의 텍스트로 존재하는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의 영혼과 뉴욕에서 만난 21세기 미국 연기의 역사인 '우타 하겐'의 영감이 내 몸을 통해 아이들과 교감을 했을 겁니다."
마치 무당들의 영매 의식처럼 연기를 가르치던 그녀는 8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톱스타가 된 아이들 앞에서 편안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었다.
"스타 배우 란탄, 미스 그랜드 인터네셔널 의 정상 '응우옌 툭 투이티엔', 베트남의 아이콘 MC '피링'. 톱 모텔 겸 배우 '광 다이'를 보러온 구름 같은 팬들을 보면 눈물이 나지요. 내가 낳은 아이들처럼 붙들고 울어도 이젠 괜찮아요. 8년의 세월이 자랑스럽거든요."
그래서 그녀는 그들과의 이야기들을 기록해서 논문을 썼다. 미국 로드랜드 대학에서는 그녀의 박사논문을 검증하고 최우수 박사 학위 논문상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녀의 수업은 이제 400대 1의 경쟁률을 돌파해야 들을 수 있다.
베트남에서 그녀의 클래스에 합류한다는 건 곧 스타가 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때 "베트남에서 스타가 되려면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국가대표가 되거나 박리디아 의 클래스에 들어가야 한다."라는 말이 떠돌았다.
" 연예계의 박항서라는 말을 듣기도 했어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너무 기분 좋았지요. 내 아이들이 스타로 빛나는걸. 보면 언제든 울컥하고, 꿈이 이루어진다는 걸 확인할 때. 행복하지요."
그때, 참으로 외롭게 딴따라 씨앗을 뿌렸던 동지들은 이제 '시네마 이벤트 조직위원회'를 결성해서 "다낭 아시아 영화제"를 만들고 세계적인 영화와 세계적인 스타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제, 베트남에서 '스타를 낳는 엄마, 스승님'으로 불리는 그녀는 이제 그들을 키운 눈물의 기록인 논문을 출간해서 더 많은 딴따라에게 나누어 주고 싶은 소망이 있다.
"제가 얼마나 목말라 했는지 알잖아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눈가가 위태위태하다.
그녀는 그냥 사는 게 아니라 마치 상륙작전을 하듯이 살아왔다.
그 상륙작전의 좌표였던 어머니의 상실은 날카로운 창이 되어 그녀의 정수리를 관통했다.
혼돈의 바다에서 익사 직전, 어머니의 유품을 모아 옷뭉치를 만들고 자궁 속에서의 기억을 되돌려 '태동'이라는 예술로 승화시켰다.
'태동'이라는 연극은 극단 '물맑은'의 초연 작품이다.
예상대로 '태동'의 기획은 물론이고 극본, 연출 배우까지 그녀가 맡았다. 사실은 무대미술도 음악도 조명도 그녀가 하라고 해서 하는 거다. 이 정도면 웬만해선 해병대도 대적 못할 거다. 사실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극단 대표도 그녀가 '시켜서 하는 거다!'라는 소문인데 일부러 확인은 하지 않았다.
잘생긴 배우를 남편으로 맞은 그녀가 양평에 상륙한 건 11년, 햇수로 12년째다.
그동안 잘 참아왔다. 물 맑은 동네에서 순한 동네사람으로 살았지만 때가 되면 철새처럼 남쪽으로 날아가 나름 큰 농사를 지어왔다.
베트남에서 사람 농사를 지어 온 지 어언 8년째인데...
"농사는 또 텃밭 농사가 더 맛있잖아요"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럴 리가 절대로 없다는 걸 모두안다. 사람농사 만큼 힘든 일은 없다.
그렇게 2025년 6월에 개최되는, 오사카 인터내셔널 페스티벌 경연에 '태동'이 초청받게 됐단다.
일부러 놀란 티를 내면서 말했지만 누가 그걸 믿겠는가?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있는 연극상인 '토니상' 수상 소식이 와도 그녀는 마치 시골 학교 운동회에서 계주 1등 정도 한 것처럼 그렇게 말할거다.
"뉴욕애들도 이젠 한국말을 좀 알아 듣나봐 우리 '태동'이 '토니상'을 땄다네요."
연극이라는 '신'을 만나 '내림굿' 하듯 사는 사람, 화려한 외모보다 빛나는 지구력, 지독한 목표지향 의식이 뼛속까지 꽉찬 배우, 박 리디아는 그런 여자다!
해병대야, 깔아 !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작권자ⓒ 시민일보. 무단전재-재배포 금지]